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World of Warcraft) 오염된 피 사건, 가상 세계의 전염병이 현실의 질병 연구에 남긴 놀라운 교훈

2005년 가을 한 게임 속 도시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습니다. 붉은 기운에 휩싸인 캐릭터들이 광장 한가운데서 픽픽 쓰러졌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도시를 버리고 들판으로 도망쳤습니다. 누군가는 몸을 던져 다른 사람을 치료했고 누군가는 일부러 병을 퍼뜨리며 웃었습니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라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실제로 벌어진 오염된 피 사건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 뒤입니다. 게임 속 버그 하나로 시작된 이 소동을 실제 전염병 학자들이 논문으로 연구했고 15년 뒤 코로나19가 세계를 덮쳤을 때 다시 소환되었습니다. 오늘은 가상 세계의 전염병이 어떻게 현실의 질병 연구에 기여하게 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줄구룹의 보스 학카르가 남긴 저주

2005년 9월 13일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 새로운 공격대 던전 줄구룹이 추가되었습니다. 스무 명이 함께 도전하는 이 던전의 마지막 보스는 피의 신 학카르였습니다. 학카르는 오염된 피라는 저주를 걸었는데 이 저주에 걸린 캐릭터는 2초마다 큰 피해를 입어 최고 레벨 캐릭터도 30초 안에 쓰러질 수 있었습니다. 더 무서운 점은 이 저주가 가까이 있는 다른 캐릭터에게 옮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이 저주는 보스 방 안에서만 잠깐 작용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거나 학카르를 쓰러뜨리면 사라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고레벨 공격대원들에게는 체력을 관리하고 서로 거리를 벌리게 만드는 긴장감 넘치는 전투 장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개발진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틈이 있었습니다. 사냥꾼이나 흑마법사 같은 직업은 애완동물을 데리고 다니는데 전투 중 애완동물을 잠시 소환 해제하면 그 상태가 그대로 저장되었습니다. 저주에 걸린 애완동물을 넣어두었다가 대도시에서 다시 불러내면 저주도 함께 따라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보스 방에 갇혀 있어야 할 저주가 세상 밖으로 빠져나왔습니다.

애완동물이 퍼뜨린 전염병 도시를 삼키다

대도시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입니다. 장비를 수리하고 물건을 사고팔고 친구를 만나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이곳에 저주 걸린 애완동물이 나타나자 오염된 피는 순식간에 퍼졌습니다. 고레벨 캐릭터는 몇 번 버틸 수 있었지만 저레벨 캐릭터는 저주에 닿는 순간 곧바로 쓰러졌습니다. 오그리마와 아이언포지 같은 대도시의 거리는 순식간에 해골로 뒤덮였습니다.

사태를 더 키운 것은 도시의 주민들이었습니다. 상인이나 경비병 같은 컴퓨터 캐릭터들도 저주에 걸렸는데 이들은 죽지 않도록 설정되어 있었습니다. 병에 걸려도 아무렇지 않은 무증상 보균자가 된 셈입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병을 옮기며 도시를 오염시켰습니다.

빠른 이동 수단도 확산을 부추겼습니다. 플레이어들은 그리폰이나 순간이동으로 대륙을 오갔고 그때마다 저주도 함께 이동했습니다. 한 도시에서 시작된 병은 며칠 사이 여러 서버의 대도시로 번져나갔습니다. 현실에서 비행기가 전염병을 먼 나라로 실어 나르는 모습과 너무나 닮은 광경이었습니다.

치유사와 경고꾼 그리고 일부러 퍼뜨린 사람들

오염된 피 사건이 특별했던 이유는 병 자체보다 사람들의 반응에 있었습니다. 수많은 플레이어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움직였고 그 모습은 실제 재난 상황과 놀라울 만큼 비슷했습니다.

치유 능력이 있는 캐릭터들은 스스로 구조대가 되었습니다. 쓰러지는 사람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치료했고 그러다 자신도 감염되어 쓰러지기를 반복했습니다. 저레벨 캐릭터들은 도시 입구에 서서 들어오지 말라고 소리쳐 경고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병이 사라질 때까지 사람 없는 들판으로 떠나 스스로 격리 생활을 했습니다.

반대로 일부러 병을 퍼뜨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게임 속에서 남을 괴롭히며 즐거움을 찾는 이들은 감염된 채로 사람이 많은 곳에 뛰어들었습니다. 한 사람은 해외 언론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재미있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호기심에 일부러 감염 지역을 구경하러 가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선의와 악의와 호기심이 한데 뒤섞인 이 모습이 훗날 과학자들의 눈길을 끌게 됩니다.

블리자드의 봉쇄 작전과 서버 초기화로 끝난 3주

블리자드는 사흘 뒤인 9월 16일 문제를 인정하고 대응에 나섰습니다. 처음에는 감염 지역을 격리하려 했지만 플레이어들이 격리 구역을 피해 돌아다니면서 효과가 없었습니다. 서버를 차례로 다시 시작해 보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다시 모이면 병도 다시 퍼졌습니다. 현실의 봉쇄 정책이 사람들의 협조 없이는 쉽게 무너지는 모습과 비슷했습니다.

결국 블리자드는 10월 8일 서버를 병이 퍼지기 전 상태로 되돌리는 강력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후 애완동물이 오염된 피에 걸리지 않도록 게임을 수정하면서 약 3주 동안 이어진 가상 세계의 전염병은 막을 내렸습니다. 2020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클래식에 줄구룹이 다시 등장했을 때도 이 수정 덕분에 같은 사태는 반복되지 않았습니다.

블리자드는 이 사건을 흑역사로만 남기지 않았습니다. 2008년 확장팩 리치 왕의 분노를 앞두고는 일부러 좀비 전염병 이벤트를 열어 사람들이 다시 한번 감염과 생존의 긴장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실수로 태어난 전염병이 게임의 전설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게임 속 전염병에 주목한 이유

전염병 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컴퓨터 모형으로 병이 퍼지는 과정을 예측해 왔습니다. 하지만 모형에는 큰 약점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행동할지를 숫자로 담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겁을 먹고 도망가기도 하고 호기심에 위험한 곳으로 향하기도 하며 규칙을 무시하기도 합니다.

2007년 미국 터프츠 대학교의 에릭 로프그렌과 니나 페퍼먼은 세계적인 의학 학술지 랜싯 감염병 분야에 오염된 피 사건을 다룬 논문을 실었습니다. 로프그렌은 사건 당시 직접 게임을 하던 플레이어이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은 수많은 사람이 자기 의지로 움직이는 가상 세계가 기존 모형에는 없는 인간 행동을 관찰할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위험을 알면서도 구경하러 간 사람들의 호기심은 실제 전염병 현장에 몰려드는 기자나 구경꾼과 닮았다고 보았습니다.

같은 해 이스라엘의 역학자 란 발리서도 역학 학술지에 논문을 냈습니다. 그는 증상 없이 병을 옮긴 애완동물과 주민들을 조류독감을 퍼뜨리는 오리에 비유했습니다. 빠른 이동 수단이 병을 먼 곳으로 옮긴 모습은 2000년대 초 사스가 비행기를 타고 퍼진 과정과 닮았다고 설명했습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도 블리자드에 연락해 자료를 요청했지만 버그로 생긴 일이라 남은 자료가 없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테러 연구자들은 일부러 병을 퍼뜨린 사람들의 행동이 생물 테러 연구에 참고가 될 수 있다고 보기도 했습니다.

코로나19 이후 다시 소환된 오염된 피 그리고 분명한 한계

2020년 코로나19가 세계를 덮치자 오염된 피 사건은 다시 주목받았습니다. 도시에서 폭발적으로 퍼진 모습과 봉쇄가 쉽게 뚫린 모습 그리고 이동이 병을 멀리 실어 나른 모습이 현실과 너무 닮았기 때문입니다. 로프그렌은 환자를 돌보다 쓰러진 게임 속 치유사들을 지친 의료진에 비유했고 감염되고도 격리를 거부한 사람들도 현실에 똑같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같은 해 한 팬 서버에서는 일부러 가상 전염병 실험을 열었는데 위생과 격리 조치를 도입하자 감염률이 크게 줄어드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한계도 분명히 짚어야 합니다. 게임 속에서는 죽어도 곧바로 되살아날 수 있어서 사람들이 현실보다 훨씬 대담하게 행동합니다. 목숨이 걸린 현실의 공포와 게임 속 긴장감은 같을 수 없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게임 자료가 수학 모형의 약점을 정말로 보완하는지 의문을 제기했고 영국의 역학자 닐 퍼거슨 같은 전문가도 게임과 현실의 행동 규범이 다르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무엇보다 오염된 피 사건은 계획된 실험이 아니라 사고였기 때문에 정확한 기록이 남지 않았습니다.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이지 현실을 그대로 옮긴 실험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버그 하나가 인류에게 던진 진지한 질문

오염된 피 사건은 개발자의 작은 실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실수는 위기 앞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비추는 거울이 되었습니다. 누군가는 남을 구했고 누군가는 경고했으며 누군가는 스스로를 가뒀고 또 누군가는 혼란을 즐겼습니다. 게임 속 해골로 뒤덮였던 도시는 결국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었습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오염된 피 사건이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회자되는 이유는 그것이 게임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전염병이 찾아왔을 때 나는 치유사가 될지 경고꾼이 될지 한 번쯤 생각해 보게 만드는 사건입니다.

#월드오브워크래프트 #오염된피사건 #와우 #게임속전염병 #전염병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