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코 엘리시움(Disco Elysium), 전투 하나 없이 오직 대화와 사상만으로 수상을 휩쓴 명작

눈을 뜨자 방은 엉망이고 옷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왜 여기 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머릿속에서는 여러 목소리가 제각각 떠들기 시작합니다. 디스코 엘리시움은 이렇게 한 남자가 망가진 채로 깨어나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2019년 10월 에스토니아의 스튜디오 ZA/UM이 내놓은 디스코 엘리시움은 칼도 총도 제대로 휘두르지 않는 롤플레잉 게임입니다. 그런데도 이 게임은 세계 곳곳에서 극찬을 받았고 게임 시상식을 휩쓸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디스코 엘리시움이 어떤 이야기와 시스템으로 그런 평가를 받았는지 결말까지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기억을 잃은 형사가 눈을 뜬 곳은 어떤 도시일까요

주인공은 리바숄이라는 도시의 경찰입니다. 이 도시는 혁명이 실패한 뒤 외국 세력에게 점령당한 채 오랫동안 가난과 혼란에 시달려 왔습니다. 주인공은 술과 약물에 빠져 지내다 기억을 몽땅 잃고 마르티네즈라는 낡은 항구 지역에서 눈을 뜹니다. 이름조차 잊었던 그는 곧 해리 뒤부아라는 형사임을 알게 됩니다.

해리에게는 임무가 하나 있습니다. 호텔 뒤편 나무에 매달려 있는 시체의 정체와 범인을 밝혀내는 것입니다. 그의 곁에는 젊고 침착한 경위 킴 키츠라기가 파트너로 붙습니다. 제멋대로인 해리와 원칙적인 킴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를 믿게 되고 이 관계가 게임의 가장 따뜻한 축이 됩니다.

사건을 파고들수록 이야기는 단순한 살인 사건을 넘어섭니다. 항구에서는 부두 노동자들의 파업이 벌어지고 있고 죽은 사람은 이 파업을 깨뜨리기 위해 온 용병이었습니다. 정치와 계급 그리고 잃어버린 혁명의 기억이 사건 뒤에 겹겹이 숨어 있습니다.

전투 없이 오직 대화만으로 어떻게 싸움이 벌어질까요

디스코 엘리시움에는 흔한 전투 화면이 없습니다. 그 대신 대화와 주사위 굴림이 싸움을 대신합니다. 어떤 행동을 시도하면 능력치와 운이 합쳐져 성공과 실패가 갈립니다. 그리고 그 실패조차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 다음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가장 독특한 것은 스물네 가지 기술입니다. 이 기술들은 지성 정신력 체력 운동신경이라는 네 가지 능력치로 묶여 있고 각각이 해리 머릿속의 목소리가 됩니다. 논리는 차분히 추리를 돕고 환각은 뜬금없는 상상을 던지며 비굴함은 남의 눈치를 살피게 만듭니다. 플레이어는 자기 안의 여러 자아와 대화하면서 선택을 이어 갑니다.

그래서 이 게임은 같은 장면도 플레이어마다 전혀 다르게 흘러갑니다. 어떤 기술에 점수를 주었느냐에 따라 해리는 냉철한 형사도 되고 감성적인 몽상가도 되며 한심한 주정뱅이도 됩니다. 실패해서 웃음이 터지는 순간마저 이 게임에서는 매력입니다.

생각 캐비닛과 사상은 왜 이 게임을 특별하게 만들었을까요

디스코 엘리시움의 또 다른 핵심은 생각 캐비닛입니다. 해리가 떠올린 생각이나 사상을 캐비닛에 넣고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내면에 자리를 잡아 능력치에 영향을 줍니다. 좋은 효과와 나쁜 효과가 함께 따라오기 때문에 어떤 생각을 품을지가 곧 성장 방향이 됩니다.

이 게임은 정치 사상을 다루는 방식도 눈에 띕니다. 공산주의 자유주의 도덕주의 같은 다양한 이념이 해리 안에서 부딪히고 플레이어는 그 사이를 오가며 자신의 신념을 시험하게 됩니다. 어느 쪽이 옳다고 정답을 강요하지 않고 각 사상의 매력과 우스꽝스러움을 함께 보여 주는 점이 인상 깊습니다.

문장도 이 게임의 큰 무기입니다. 게임은 사실상 한 권의 소설을 읽는 것과 같은 방대한 글로 이루어져 있고 2021년 확장판인 파이널 컷에서는 모든 대사에 목소리 연기가 더해졌습니다. 글로 읽던 세계가 소리를 얻으면서 몰입감이 한층 깊어졌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킴 키츠라기와 마르티네즈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요

마르티네즈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사연을 안고 있습니다. 파업을 이끄는 노동조합 사람들과 잔뜩 눈치를 보는 상인들 그리고 어린 아이까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무너진 도시를 살아갑니다. 플레이어는 이들과 대화하며 이 동네의 상처를 조금씩 이해합니다.

그중에서도 킴은 이 게임 최고의 조연으로 꼽힙니다. 해리가 온갖 사고를 쳐도 담담하게 받아 주고 때로는 날카로운 한마디를 던지며 균형을 잡아 줍니다. 팬들이 킴을 게임 속 가장 사랑받는 캐릭터로 꼽는 이유는 그가 해리를 판단하지 않고 곁을 지켜 주기 때문입니다.

스포일러 주의 지금부터는 게임의 결말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플레이하지 않으셨다면 여기서 멈추시기를 권합니다.

사건의 진실과 해리의 결말은 어떻게 끝났을까요

수사 끝에 드러나는 진실은 이렇습니다. 나무에 매달린 남자는 파업을 깨기 위해 온 용병 대령이었습니다. 그는 실제로는 총에 맞아 죽었고 이후 부두 노동자 무리가 시체를 나무에 매단 것으로 밝혀집니다. 총을 쏜 사람은 예전에 공산주의 군인이었던 이오시프 드로스였고 그 배경에는 정치적 원한과 질투가 얽혀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게임의 결말은 범인을 잡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해리가 누구였는지 어떤 상처 때문에 스스로를 망가뜨렸는지가 함께 드러납니다. 잃어버린 기억은 사랑과 상실 그리고 혁명의 실패와 이어져 있고 플레이어는 그 아픔을 마주한 해리가 어떤 사람으로 남을지를 스스로 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엔딩 화면이 올라와도 개운함보다는 긴 여운이 남습니다. 사건은 풀렸지만 도시는 여전히 가난하고 정치는 여전히 답을 내지 못합니다. 이 열린 마무리가 오히려 게임을 더 오래 기억하게 만듭니다.

수상 경력과 그 뒤에 남은 그림자는 무엇일까요

디스코 엘리시움은 2019년 더 게임 어워드에서 최고 서사상과 최고 인디 게임상을 포함해 네 개 부문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해 올해의 게임상 자체는 다른 작품에게 돌아갔기 때문에 올해의 게임을 휩쓴 것은 아니고 서사와 인디 분야를 휩쓴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그래도 전투 없는 게임이 이 정도 평가를 받았다는 점은 놀라운 성과입니다. 판매량도 500만 장을 넘었다고 전해집니다.

다만 성공 뒤에는 어두운 소식도 있었습니다. 2021년 스튜디오 내부 갈등으로 핵심 제작자들이 회사를 떠났고 그 뒤 옛 제작진이 각자 후속 프로젝트를 이어 가고 있습니다. 명작을 만든 사람들이 흩어졌다는 사실은 팬들에게 큰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냉정하게 따져 본 장점과 아쉬운 점은 무엇일까요

장점부터 이야기하면 이 게임의 글은 정말 뛰어납니다. 유머와 슬픔과 철학이 한 화면 안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고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이야기의 폭도 넓습니다. 역할 놀이의 재미를 이렇게까지 밀어붙인 작품은 흔치 않습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분명합니다. 먼저 글의 양이 엄청나서 읽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진입 장벽이 높습니다. 전투나 액션 같은 손맛을 기대하고 시작하면 금방 지루해질 수 있습니다. 또 주사위 실패로 원하는 방향이 막히는 일이 잦아서 답답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정치적 색채가 짙어 취향이 갈리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디스코 엘리시움은 게임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의 가능성을 넓힌 작품입니다. 화려한 전투 없이도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한 번쯤 천천히 읽고 고민하며 즐겨 보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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