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친구들과 둘러앉아 주사위를 던지던 기억이 있으신가요. 숫자 하나에 모두가 숨을 죽이고 결과가 나오는 순간 환호와 탄식이 동시에 터지던 그 장면 말입니다. 발더스 게이트 3는 바로 그 감정을 컴퓨터 화면 안으로 고스란히 옮겨온 게임입니다. 설득에 성공할지 자물쇠를 열 수 있을지 적의 공격을 피할지 모든 것이 주사위 한 번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이야기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실패조차 또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이 경험 덕분에 발더스 게이트 3는 출시와 함께 수많은 게이머의 인생 게임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주사위 하나로 운명이 결정되는 던전 앤 드래곤 룰을 가장 완벽하게 해석한 발더스 게이트 3를 들여다보겠습니다.
발더스 게이트 3는 어떤 게임일까
발더스 게이트 3는 벨기에의 라리안 스튜디오가 만든 롤플레잉 게임입니다. 2020년 앞서 해보기로 먼저 공개된 뒤 약 3년 동안 다듬어져 2023년 여름 정식으로 출시되었습니다. 같은 해 더 게임 어워드에서 올해의 게임을 받으며 그해 최고의 작품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이 게임의 뿌리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테이블 롤플레잉 게임인 던전 앤 드래곤입니다. 종이와 연필 그리고 주사위만으로 여러 사람이 함께 모험을 만들어가는 놀이로 이 게임의 최신 규칙인 5판을 거의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캐릭터를 만들 때 종족과 직업을 고르고 힘과 민첩과 지능 같은 능력치를 정하는 과정부터 테이블 앞에 앉은 듯한 기분이 듭니다.
발더스 게이트라는 이름은 1990년대 후반에 나온 전설적인 시리즈에서 이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전작을 몰라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이야기는 새로운 주인공과 새로운 사건으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발더스 게이트 3는 던전 앤 드래곤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입문서가 되어주는 게임입니다.
머릿속 올챙이 하나에서 시작된 모험
이야기는 끔찍한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주인공은 문어 머리를 한 괴물 마인드 플레이어에게 납치되어 거대한 비행선 안에서 눈에 기생 올챙이가 들어가는 일을 당합니다. 이 올챙이가 자라면 몇 주 안에 주인공 역시 마인드 플레이어로 변하게 됩니다. 그런데 비행선이 공격을 받아 추락하면서 주인공은 가까스로 살아남습니다.
잔해 사이에서 눈을 뜬 주인공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생존자들을 만납니다. 비밀을 감춘 성직자 섀도하트와 능글맞은 엘프 아스타리온 그리고 마법사 게일과 전사 종족 기스양키의 레이젤 등이 차례로 동료가 됩니다. 모두 머릿속에 같은 올챙이를 품고 있다는 공통점 하나로 뭉친 사이입니다. 서로를 믿지 못하면서도 살아남으려면 함께 치료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시간이 지나도 누구 하나 괴물로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올챙이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거나 조종하는 신비한 힘을 주기 시작합니다. 꿈속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수호자가 나타나 주인공을 돕겠다고 속삭입니다. 한편 세상 곳곳에서는 절대자라 불리는 존재를 따르는 광신도들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주인공 일행은 이 사건들이 모두 머릿속 올챙이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뒤를 쫓아 거대한 항구 도시 발더스 게이트로 향합니다.
주사위 한 번에 울고 웃는 던전 앤 드래곤 룰
발더스 게이트 3의 모든 판정은 스무 면짜리 주사위로 이루어집니다. 경비병을 설득할 때나 함정을 찾을 때나 자물쇠를 딸 때 화면에 커다란 주사위가 굴러갑니다. 목표 숫자를 넘으면 성공이고 못 넘으면 실패입니다. 20이 나오면 무조건 성공하는 대성공이고 1이 나오면 무조건 실패하는 대실패입니다. 능력치와 숙련도가 주사위 결과에 보너스를 더해주기 때문에 캐릭터를 어떻게 키웠는지도 결과에 영향을 줍니다.
이 게임이 특별한 이유는 실패해도 이야기가 멈추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설득에 실패하면 전투가 벌어지고 몰래 들어가다 들키면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같은 장면도 주사위 결과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말로 이어지니 플레이어마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갖게 됩니다.
전투는 차례대로 움직이는 턴제 방식입니다. 여기서 라리안 스튜디오의 장기가 빛납니다. 높은 곳에서 공격하면 명중률이 오르고 적을 밀어서 절벽 아래로 떨어뜨릴 수도 있습니다. 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이거나 물웅덩이에 번개를 쏘아 여러 적을 한꺼번에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규칙은 탄탄하지만 그 안에서 무엇을 할지는 자유라서 테이블 앞에서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던 재미가 그대로 살아납니다.
동료들이 살아 숨 쉬는 진짜 이유
발더스 게이트 3의 동료들은 단순히 함께 싸우는 전투원이 아닙니다. 저마다 과거의 상처와 비밀을 안고 있고 주인공의 선택에 따라 호감을 보이기도 하고 등을 돌리기도 합니다. 캠프에서 나누는 대화는 모험 못지않게 중요하며 관계가 깊어지면 연애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아스타리온은 오랫동안 주인에게 짓눌려 살아온 뱀파이어 노예였습니다. 겉으로는 가볍고 냉소적이지만 그 뒤에는 자유를 향한 간절함이 숨어 있습니다. 이 캐릭터의 목소리를 맡은 닐 뉴본은 그해 더 게임 어워드에서 최고 연기상을 받았을 만큼 섬세한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지옥에서 탈출한 전사 칼라크는 가슴에 달린 뜨거운 엔진 때문에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없는 처지이지만 누구보다 밝게 웃는 인물입니다. 섀도하트는 자신이 섬기는 여신의 명령과 잃어버린 기억 사이에서 흔들립니다.
모든 대사에 목소리 연기가 들어가 있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레이터의 목소리도 테이블 앞 진행자처럼 분위기를 살립니다. 선택지가 많다 보니 어떤 동료는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채 게임이 끝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수많은 갈래가 있기 때문에 한 번 엔딩을 보고 나서도 다시 시작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세 명의 선택받은 자와 두뇌를 둘러싼 마지막 결단
스포일러 주의 이 부분에는 발더스 게이트 3의 핵심 반전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행 끝에 밝혀진 진실은 충격적입니다. 절대자는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죽음과 살인과 폭정의 신을 섬기는 세 명의 선택받은 자였습니다. 이들은 비행선에서 빼앗은 거대한 마인드 플레이어의 두뇌를 신비한 왕관으로 조종하며 올챙이를 품은 사람들을 꼭두각시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주인공이 괴물로 변하지 않은 이유는 꿈속 수호자 덕분이었는데 그 정체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위장한 마인드 플레이어 황제였습니다. 황제는 기스양키 왕자 오르페우스의 힘을 빌려 일행의 올챙이를 막아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인공 일행은 선택받은 자들을 하나씩 쓰러뜨리지만 마지막 순간 두뇌는 왕관의 통제에서 벗어나 발더스 게이트 전체를 집어삼키려 합니다. 이 두뇌를 없애려면 누군가 마인드 플레이어가 되어 그 속으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오르페우스를 풀어주어 그가 희생하게 할지 황제의 편에 설지 아니면 주인공이나 동료가 스스로 괴물이 되는 길을 택할지는 플레이어의 몫입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두뇌는 파괴되고 도시는 구원받지만 그 대가는 저마다 다릅니다. 에필로그에서는 동료들이 각자의 선택에 따라 전혀 다른 미래를 맞이하며 긴 여정이 마무리됩니다.
200시간을 삼킨 명작의 솔직한 장단점
장점은 말할 것도 없이 선택의 자유입니다. 대화로 풀든 몰래 지나가든 싸우든 게임은 거의 모든 방법을 받아줍니다. 동료들의 이야기는 깊이가 있고 목소리 연기와 연출은 영화 못지않습니다. 던전 앤 드래곤을 모르는 사람도 자연스럽게 규칙을 익힐 수 있을 만큼 친절하게 만들어졌다는 점도 큰 장점입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분명합니다. 한 번 엔딩을 보는 데만 100시간이 넘게 걸리고 모든 것을 즐기려면 그 두 배가 필요해 부담이 큽니다. 1막과 2막의 완성도에 비해 3막은 도시가 너무 커서 이야기 흐름이 흩어진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출시 초기에는 3막에서 버그와 프레임 저하도 잦았습니다. 인벤토리가 복잡하고 턴제 전투 특성상 적이 많으면 한 번의 전투가 오래 걸립니다. 운이 나쁘면 몇 번이고 불러오기를 반복하게 만드는 주사위의 잔인함도 사람에 따라 스트레스가 될 수 있습니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이야기는 당신의 것이 됩니다
발더스 게이트 3가 특별한 이유는 정답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같은 게임을 해도 누구는 영웅이 되고 누구는 악당이 되며 누구는 주사위 1 때문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길을 걷습니다. 그 모든 결과가 틀린 것이 아니라 그 사람만의 이야기로 인정받습니다. 친구들과 주사위를 굴리던 테이블의 설렘을 이렇게 크고 정교하게 되살린 게임은 흔치 않습니다. 주사위 하나로 운명이 결정되는 던전 앤 드래곤 룰을 가장 완벽하게 해석한 발더스 게이트 3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꼭 한 번 직접 굴려볼 가치가 있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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