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한 줄기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소중한 사람을 지켜야 한다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이그노스트라는 국내 인디 개발팀이 만든 어비스 에버라스팅은 무저갱이라 불리는 칠흑 같은 세계를 배경으로 소꿉친구인 무녀를 빛의 도시까지 호위하는 여정을 그린 텍스트 어드벤처 로그라이크입니다. 전작 백야기담으로 탄탄한 팬층을 확보했던 개발사의 신작이라는 점에서 출시 전부터 많은 기대를 모았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2024년 9월 스토브를 통해 정식 출시된 이 게임은 전작인 유어 블라이트의 외전격 작품을 표방하고 있어서 세계관을 공유하는 팬 서비스적인 요소도 곳곳에 담겨 있습니다. 기대와 함께 직접 플레이해본 소감을 있는 그대로 풀어보려 합니다. 인디 게임 특유의 개성과 아쉬움이 뚜렷하게 공존하는 작품이었던 만큼 좋았던 점과 부족했던 점을 균형 있게 짚어보겠습니다.
루트 선택으로 완전히 달라지는 세 갈래의 여정
어비스 에버라스팅의 가장 큰 특징은 시작할 때 고르는 루트에 따라 이야기의 결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패자 없는 대지 아득한 광야 깊이 모를 진창이라는 세 가지 루트가 존재하며 각 루트마다 등장하는 동료와 이벤트가 전혀 다르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패자 없는 대지는 다양한 환경이 고르게 배치되어 있어 입문용으로 무난하다는 인상을 받았고 아득한 광야는 황야 지형과 불 속성 몬스터가 자주 등장해 냉기 무기를 준비해두면 한결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깊이 모를 진창은 처음에는 선택할 수 없고 두 번째 회차부터 개방되는데 수렁이라는 환경이 많이 등장해 난이도가 제법 높게 느껴졌습니다. 총 열네 명의 동료가 존재하지만 한 루트에서는 네다섯 명만 만날 수 있고 그중에서도 파티에는 세 명만 합류시킬 수 있어 모든 동료를 만나려면 최소 서너 번의 회차를 돌아야 합니다. 동료를 한 명 선택하면 다른 동료는 아예 등장하지 않는 분기도 있어서 첫 만남에서의 선택이 이후 여정 전체를 좌우한다는 긴장감도 느껴졌습니다. 이러한 반복 플레이 구조는 로그라이크 장르의 재미를 살리려는 시도로 보였지만 동시에 같은 초반부를 여러 번 반복해야 한다는 피로감으로도 이어졌습니다. 특히 회차마다 등장하는 대사와 이벤트가 크게 다르지 않은 구간이 반복되다 보니 후반 회차로 갈수록 새로움보다는 관성으로 진행하게 되는 순간이 적지 않았습니다.
아이콘을 클릭하며 진행하는 독특한 텍스트 어드벤처 구성
전작들이 필드를 직접 돌아다니며 탐험하는 방식이었다면 어비스 에버라스팅은 지도 위의 아이콘을 클릭해 이벤트를 확인하며 진행하는 방식으로 크게 바뀌었습니다. 마을 황야 수림 수렁 폐허라는 다섯 가지 환경을 오가며 각 지역에 배치된 몬스터와 이벤트를 소화하는 구조인데 이 변화는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부분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직접 필드를 누비던 이전 시리즈의 손맛이 그리웠지만 텍스트와 삽화 중심으로 서사에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은 나름의 장점으로 다가왔습니다. 아이콘을 클릭할 때마다 짧은 삽화와 함께 상황이 전개되는 방식이라 모바일이나 가벼운 세션 플레이에는 오히려 더 적합하다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마을에서는 여관이나 성당에 머물며 동료와 시간을 보내거나 스트레스를 관리할 수 있는데 동료마다 성향이 달라서 모두를 만족시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렴한 여관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신실한 성향의 동료를 데리고 있을 때는 성당행을 고민하게 되는 식으로 나름의 전략적 재미도 있었습니다. 두 번째 회차부터는 소굴이라는 던전과 직업을 바꿀 수 있는 훈련소 등 편의 기능이 추가되어 반복 플레이의 부담을 조금은 덜어주는 느낌이었습니다. 전투 자체는 화려하지 않지만 직업별 패시브와 동료 조합에 따라 공략 방식이 달라지는 재미가 있어서 단순 반복으로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감정선이 아쉬운 세계관과 짧은 호흡의 서사
무저갱이라는 세계관 자체는 상당히 매력적입니다. 빛이 닿지 않는 거대한 공동에서 인간들이 백왕이 하사한 탑의 빛에 의지해 살아가고 그 대가로 주기적으로 무녀를 빛의 도시 루에 바친다는 설정은 다크 판타지 특유의 무게감을 잘 살리고 있습니다. 전작 유어 블라이트의 외전을 표방하고 있어서 전작을 즐긴 플레이어라면 곳곳에서 낯익은 장면과 설정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메인 스토리의 완결성입니다. 전작이 하나의 큰 줄기를 중심으로 조연과 서브 스토리가 이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구조였다면 이번 작품은 세계관을 설명하는 짧은 이야기들이 나열되는 느낌이 강합니다. 인물 간의 관계와 감정선이 기승전결 중 결을 제대로 맺지 못하고 마무리되는 인상을 받아서 몰입하던 흐름이 뚝 끊기는 순간들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로그라이크 장르 특성상 짧은 호흡으로 이야기를 나눠 배치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 결과 서사의 여운은 이전 작품에 비해 옅어졌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습니다.
결말 스포일러 주의 루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과 그 이후
여기서부터는 게임의 진행과 결말 방향에 관한 내용을 다루니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는 분은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무녀를 무사히 빛의 도시 루까지 호위하는 것이 표면적인 목표지만 여정 도중 만나는 동료와 사건들에 따라 결말로 향하는 과정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다만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결말 자체는 루트를 바꿔도 큰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무녀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여정의 끝에서 백왕과 탑의 빛을 둘러싼 진실에 조금씩 다가가지만 이 진실이 명확하게 해소되기보다는 여운만 남긴 채 마무리되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회차를 거듭하며 다른 동료와 다른 루트를 경험해야 비로소 세계관의 전체 그림이 조금씩 맞춰지는 구조라서 한 번의 플레이만으로는 이야기의 결말에 완전히 만족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열린 결말에 가까운 마무리 방식이 개인적으로는 다소 아쉽게 다가왔습니다.
솔직하게 정리하는 어비스 에버라스팅의 장점과 단점
어비스 에버라스팅을 끝까지 플레이한 소감을 솔직하게 정리하자면 좋은 재료를 가지고도 요리는 완성도 있게 마무리 짓지 못한 작품이라는 인상이 강합니다. 장점을 먼저 꼽자면 무저갱이라는 독창적인 세계관과 루트별로 완전히 달라지는 동료 구성은 반복 플레이의 동기를 확실히 부여합니다. 삽화와 음악의 분위기도 다크 판타지 장르에 잘 어울려서 몰입감을 높여주는 요소였습니다. 반면 단점도 명확합니다. 필드 탐험 대신 아이콘 클릭 방식으로 바뀐 진행 구조는 이전 작품의 손맛을 기대한 팬들에게는 아쉬움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메인 스토리의 완결성이 부족하고 감정선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약점으로 느껴졌습니다. 플레이 타임에 비해 체감 가격이 다소 부담스럽다는 의견도 커뮤니티에서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전작 백야기담의 완성도를 기대하고 접근한다면 실망할 가능성이 높지만 새로운 시도 자체에 의미를 두고 가볍게 즐긴다면 무저갱이라는 세계를 탐험하는 색다른 경험은 얻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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