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셀로 이루어진 투박한 세상에서 처음 나무를 베고 불을 피우던 그 소박한 설렘을 기억하십니까. 룬스케이프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수많은 게이머의 어린 시절과 현재를 잇는 거대한 추억의 저장소입니다. 신들이 빚어낸 기엘리노르 대륙의 장대한 역사와 그 속에서 펼쳐지는 무한한 자유의 이야기를 지금 상세히 들려드리겠습니다.
우주 창조의 비밀과 고대 신들의 위대한 설계
이야기는 우주가 탄생하기 이전 공허 속에서 존재했던 엘더 갓(Elder Gods)들로부터 시작됩니다. 자스, 웬, 바이크, 풀, 마라는 존재들은 우주를 창조하고 생명을 불어넣는 절대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완벽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행성을 빚어냈지만 그들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가차 없이 파괴하고 흡수했습니다. 수없는 실패와 시도 끝에 그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알을 품기에 가장 완벽하고 조화로운 행성을 만들어냈으니 그것이 바로 우리가 모험하게 될 무대 기엘리노르입니다.
하지만 엘더 갓들은 창조 후 긴 잠에 빠지거나 우주 밖으로 물러났고 비어있는 기엘리노르에 다른 존재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균형의 신 구스릭스입니다. 그는 우주를 떠돌다 엘더 갓들이 남긴 창조의 도구인 '자스의 돌'을 발견하고 이를 이용해 기엘리노르에 다양한 생명체와 종족을 데려왔습니다. 인간, 엘프, 드워프, 노움 등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종족이 이때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구스릭스는 신들이 필멸자들의 삶에 직접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기에 세계의 균형만을 맞춘 채 깊은 지하로 들어가 잠들었습니다.
제2시대 신들의 도래와 제국의 번영
구스릭스가 잠든 사이 우주의 다른 곳에서 강력한 힘을 지닌 젊은 신들이 기엘리노르의 풍요로움에 이끌려 하나둘씩 도착했습니다. 질서와 지혜를 표방하는 사라도민, 힘과 전쟁을 숭배하는 반도스, 정의와 법률을 중시하는 아마딜 등 수많은 신이 자신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내려왔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했던 존재는 어둠과 통제의 신 자로스였습니다. 자로스는 막강한 마력과 카리스마로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그의 제국은 당시 기엘리노르 전역을 지배할 정도로 웅장했으며 마법과 기술은 정점에 달했습니다.
자로스의 가장 충직한 장군이었던 자모락은 겉으로는 충성을 맹세했으나 내면에는 야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자모락은 다른 신들의 세력과 은밀히 접촉하여 반란을 꾀했습니다. 그는 전설적인 유물인 '아마딜의 지팡이'를 손에 넣었고 자로스가 방심한 틈을 타 뒤에서 그를 찔렀습니다. 신을 죽일 수 있는 무기에 찔린 자로스는 육체를 잃고 다른 차원으로 추방당했으며 그 과정에서 뿜어져 나온 막대한 에너지는 자모락을 새로운 신으로 승천시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엘리노르 역사상 가장 큰 배신이자 혼돈의 서막이었습니다.
신들의 전쟁과 황폐화된 대륙의 비극
자모락의 배신 이후 기엘리노르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자로스의 제국은 무너졌고 남은 신들은 서로 영토와 신도들을 차지하기 위해 전면전을 벌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3시대, 신들의 전쟁(God Wars)입니다. 사라도민의 성기사단, 자모락의 악마 군단, 반도스의 오크와 고블린, 아마딜의 조인족들은 서로를 학살했습니다. 대륙은 피로 물들었고 아름다웠던 도시는 폐허가 되었습니다.
전쟁의 절정은 지금의 '와일드니스' 지역에서 일어났습니다. 자모락은 패색이 짙어지자 자스의 돌을 이용해 상상을 초월하는 파괴 마법을 시전했습니다. 비옥했던 포린트리 왕국은 순식간에 불타올라 잿더미가 되었고 그 땅은 영원히 생명이 자라지 않는 죽음의 땅 와일드니스가 되었습니다. 이 거대한 충격은 지하 깊은 곳에서 잠자던 균형의 신 구스릭스를 깨웠습니다. 분노한 구스릭스는 지상으로 올라와 전쟁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는 신들이 계속 머무른다면 이 세계가 파괴될 것임을 선포하고 '구스릭스의 칙령'을 내려 모든 신을 기엘리노르 밖으로 추방했습니다. 그리고 거대한 결계를 쳐 신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인간의 시대와 모험가의 탄생
신들이 떠난 후 비로소 인간을 비롯한 필멸자들의 시대인 제4시대와 제5시대가 열렸습니다. 인간들은 잃어버린 문명을 재건하고 왕국을 세웠습니다. 미스가 린, 아스고니아, 캔다린 같은 왕국들이 들어섰고 마법사들은 룬의 신비를 연구하여 마법을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신들의 흔적은 여전히 곳곳에 남아 위협이 되었습니다. 고대 신들의 던전에는 여전히 봉인된 장군들이 서로 싸우고 있었고 자모락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은 호시탐탐 혼란을 야기하려 했습니다.
이 시점에 여러분은 럼브리지라는 작은 성 마을에서 모험을 시작합니다. 특별한 운명을 타고난 영웅이 아닌 그저 세상에 호기심 많은 초보자로 시작합니다. 빵을 굽는 요리사를 돕고, 양털을 깎아 실을 잣고, 고블린을 잡아 푼돈을 모읍니다. 하지만 성장을 거듭하며 여러분은 세상의 이면에 숨겨진 거대한 음모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전설적인 용 엘바그를 처치하여 드래곤 슬레이어의 칭호를 얻기도 하고 잊힌 사막의 신들을 깨우거나 요정들의 내분에 휘말리기도 합니다.
드래곤킨의 저주와 다가오는 위협
이야기를 진행하다 보면 '드래곤킨'이라는 강력하고도 비극적인 종족과 마주치게 됩니다. 이들은 엘더 갓들에게 구속되어 자스의 돌을 지켜야만 하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자스의 돌이 사용될 때마다 그들은 극심한 고통과 함께 파괴 본능에 휩싸입니다. 신들의 전쟁 당시 자모락이 돌을 사용했을 때 드래곤킨들이 미쳐 날뛰며 수많은 도시를 파괴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모험 중 이들의 슬픈 운명을 목격하고 고대 마법과 과학이 결합된 그들의 유산과 싸우게 됩니다.
현대 룬스케이프(RS3)의 스토리라인에서는 구스릭스의 죽음과 함께 제6시대가 열리며 추방되었던 신들이 다시 기엘리노르로 돌아오게 됩니다. 플레이어는 '월드 가디언'으로 선택받아 신들의 권능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얻고 신들의 싸움 사이에서 균형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반면 올드 스쿨 룬스케이프(OSRS)는 제5시대에 머물러 있으며 구스릭스의 칙령이 유효한 상태에서 글리에노르 대륙만의 독자적인 새로운 지역과 이야기(예: 대화재의 쿰)를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퀘스트의 깊이와 유머가 공존하는 서사
룬스케이프의 스토리가 특별한 이유는 퀘스트의 구성 방식 때문입니다. 단순히 "몬스터 10마리를 잡아오라"는 식의 퀘스트는 거의 없습니다. 모든 퀘스트는 단편 소설과 같은 서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재앙의 요리법' 퀘스트에서는 전설적인 요리사들이 모인 연회에서 시간을 멈추는 마법에 걸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차원을 넘나들며 기상천외한 요리 재료를 구해야 합니다. 펭귄들이 세계 정복을 꿈꾸며 스파이 활동을 한다는 설정이나 양 배추를 신으로 모시는 광신도들의 이야기는 특유의 영국식 유머를 보여줍니다.
동시에 '마자트'라 불리는 고대 종족의 음모를 파헤치는 '리추얼 오브 마자트' 같은 퀘스트는 대서사시 영화를 방불케 하는 진지함과 비장미를 선사합니다. 여러분은 뱀파이어들이 지배하는 모리타니아 지역에서 레지스탕스를 돕기도 하고 엘프들의 도시 프리프디나스에 들어가기 위해 복잡한 퍼즐을 풀기도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이 하나로 연결되어 기엘리노르라는 거대한 세계를 완성합니다.
자유도의 끝판왕 그리고 경제 시스템
이제 게임 플레이에 대한 평가로 넘어가겠습니다. 룬스케이프는 메타크리틱 점수로 환산하자면 80점 초중반을 줄 수 있는 저력 있는 게임입니다. 그래픽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 안에 담긴 콘텐츠의 깊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입니다.
별점: ★★★★ (4/5)
가장 큰 장점은 진정한 의미의 샌드박스형 성장입니다. 직업의 개념이 없습니다. 검을 들면 전사가 되고, 낚싯대를 들면 어부가 되며, 룬을 제작하면 마법사가 됩니다. 총 20여 가지가 넘는 스킬을 원하는 대로 올릴 수 있으며 모든 스킬을 최고 레벨(99 또는 120)까지 올리는 '맥스 케이프'는 모든 유저의 꿈입니다. 하기 싫은 전투를 억지로 할 필요가 없으며 평생 나무만 베거나 낚시만 하며 부자가 되는 것도 가능합니다.
경제 시스템 또한 완벽에 가깝습니다. '그랜드 익스체인지(Grand Exchange)'라 불리는 거래소는 주식 시장처럼 모든 아이템의 시세가 실시간으로 변동됩니다. 유저들이 채집한 자원은 2차, 3차 가공을 거쳐 최종 아이템이 되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유저가 서로 얽히고설킵니다. 초보자가 캔 구리 광석도 고레벨 유저에게 필요한 재료가 되기에 버려지는 아이템이 거의 없습니다.
불편함과 매력 사이의 줄타기
하지만 단점도 명확합니다. 가장 큰 진입 장벽은 '틱(Tick) 시스템'과 그래픽입니다. 룬스케이프는 0.6초마다 서버가 반응하는 틱 시스템을 기반으로 합니다. 때문에 캐릭터의 움직임이 즉각적이지 않고 미묘하게 뚝뚝 끊기는 느낌을 줍니다. 이는 현대의 빠르고 부드러운 액션 게임에 익숙한 유저들에게는 답답함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또한 그리드(Grid) 기반의 이동 방식은 전략적이지만 동시에 구식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또한 게임이 매우 불친절할 수 있습니다. 퀘스트를 깰 때 공략(위키)을 보지 않으면 진행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한 퍼즐이 많습니다. '그라인딩(Grinding)'이라 불리는 단순 반복 작업이 게임의 80% 이상을 차지하기 때문에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유저에게는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수백, 수천 시간을 투자해야 빛을 보는 구조는 바쁜 현대인에게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느림의 미학을 즐길 준비가 된 모험가에게
룬스케이프는 인스턴트 식품 같은 요즘 게임들과 다릅니다. 오랜 시간 푹 고아낸 사골 국물처럼 진한 맛이 있습니다. 화려한 이펙트와 빠른 레벨업, 자동 사냥에 지쳤다면 이 게임은 훌륭한 안식처가 될 것입니다. 화면 한쪽에 넷플릭스를 켜두고 무심하게 낚시를 하거나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광석을 캐는 '반방치형' 플레이는 룬스케이프만이 줄 수 있는 힐링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래픽보다는 게임성을, 획일화된 길보다는 내가 만드는 길을 선호한다면 기엘리노르 대륙은 최고의 놀이터입니다. 방대한 퀘스트의 바다에 빠져보고 싶거나, 밑바닥부터 시작해 거상이 되는 꿈을 꾸고 있다면 주저하지 마십시오. 럼브리지 성의 성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당신이 써 내려갈 역사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