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룸헤이븐 리뷰 (Gloomhaven Review), 전설적인 보드게임이 디지털로 완벽 이식된 전술 RPG

 

보드게임긱에서 오랫동안 최고 평점을 유지해온 전설적인 던전 크롤러가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글룸헤이븐은 세팔로페어 게임즈가 만든 동명의 보드게임을 플레이밍 파울 스튜디오가 디지털로 옮긴 턴제 전술 RPG입니다. 이삿짐 박스만 한 크기의 원작 보드게임을 매번 테이블에 펼쳐야 하는 수고로움 없이 즐길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원작 팬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2021년 PC로 먼저 출시된 뒤 2023년에는 닌텐도 스위치와 플레이스테이션 엑스박스 등 콘솔 플랫폼까지 이식되며 더 많은 플레이어들에게 다가갔습니다. 용병 무리를 이끌고 던전을 탐험하며 의뢰를 수행하는 이 게임을 직접 플레이하며 느낀 점을 솔직하게 정리해보려 합니다. 보드게임 원작의 명성이 워낙 높았던 만큼 기대와 궁금증을 동시에 안고 시작했던 여정이었습니다.

카드 두 장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독창적인 전투 시스템

글룸헤이븐의 가장 큰 특징은 원작 보드게임의 핵심이었던 카드 기반 전투 시스템을 그대로 계승했다는 점입니다. 매 턴이 시작될 때 손에 든 카드 중 두 장을 선택해야 하는데 각 카드는 상단과 하단에 서로 다른 능력이 적혀 있고 위에 놓은 카드의 숫자가 그 턴의 행동 순서를 결정합니다. 공격과 이동 중 어떤 능력을 상단에 쓰고 어떤 능력을 하단에 쓸지 매번 고민해야 하는 구조라서 단순히 강한 카드를 반복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는 조합을 찾아내는 퍼즐적인 재미가 상당했습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점은 체력이 아니라 사용 가능한 카드의 수가 곧 캐릭터의 생존 자원이라는 설계입니다. 카드를 계속 소모하다 보면 결국 탈진해 던전에서 강제로 퇴각해야 하는 상황이 오기 때문에 매 전투마다 자원을 얼마나 아껴 쓸지 계산하는 긴장감이 게임 내내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카드 시스템은 원작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익숙해지고 나면 다른 전술 RPG에서는 느끼기 힘든 독특한 매력으로 다가옵니다. 여기에 몬스터의 행동이 별도의 카드 덱으로 미리 정해져 있어서 적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예측하며 전략을 세울 수 있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무작정 강력한 공격 카드만 계속 사용하기보다는 다음 턴에 몬스터가 어떻게 움직일지 가늠하며 이동과 공격의 우선순위를 조율하는 과정에서 진짜 전장을 지휘하는 듯한 몰입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은퇴하고 성장하는 용병들의 여정

글룸헤이븐의 캐릭터 성장 방식도 상당히 독특합니다. 각 용병 클래스는 저마다 개인 목표를 지니고 있고 이 목표를 달성하면 해당 캐릭터는 이야기 속에서 은퇴하게 됩니다. 하나의 캐릭터만 끝까지 키우는 일반적인 RPG와 달리 플레이 도중 캐릭터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클래스를 맞이해야 하는 구조라서 다양한 플레이 스타일을 강제로라도 경험하게 되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처음에는 애착이 가던 캐릭터를 은퇴시켜야 한다는 사실이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새로운 클래스가 주는 낯선 전략을 익혀가는 과정 자체가 또 다른 재미로 다가왔습니다. 장비와 레벨업 그리고 특정 조건을 만족하면 얻는 퍽을 통해 캐릭터를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도 매 시나리오를 클리어할 때마다 성취감을 안겨주었습니다. 선택에 따라 이후 이야기가 갈라지는 구조도 마련되어 있어서 재플레이 시에도 새로운 전개를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 장기적인 동기 부여로 작용했습니다. 캐릭터마다 카드 구성과 전투 스타일이 완전히 달라서 새로운 클래스를 처음 손에 쥘 때마다 다시 게임을 배우는 듯한 신선함이 있었고 이는 장시간 플레이해도 쉽게 질리지 않는 원동력이 되어주었습니다.

아흔다섯 개의 시나리오가 주는 방대함과 그 이면의 반복성

이 게임은 캠페인 모드에서만 아흔다섯 개에 달하는 시나리오를 제공합니다. 모든 시나리오를 클리어할 필요는 없지만 그만큼 방대한 콘텐츠 분량은 분명한 강점입니다. 여기에 더해 보드게임에는 없던 길드마스터 모드가 추가되어 있어서 원작에서 다루지 않았던 새로운 지역과 진행 방식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도 디지털판만의 매력입니다. 다만 방대한 시나리오 수만큼이나 반복되는 인상을 지우기는 어려웠습니다. 대부분의 임무가 결국 적을 모두 처치하거나 일정 라운드를 버티는 형태로 귀결되다 보니 수십 시간을 플레이하고 나면 새로운 던전에 들어서도 비슷한 패턴이 반복된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이 늘어났습니다. 실제로 많은 플레이어들이 백 시간 이상 플레이한 이후부터 반복감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후기를 남기고 있어서 장시간 몰아서 플레이하기보다는 조금씩 나눠서 즐기는 편이 이 게임의 매력을 더 오래 유지하는 방법으로 보였습니다. 다행히 새로운 시나리오에 진입할 때마다 지형과 목표가 조금씩 다르게 설계되어 있어서 완전히 똑같다는 인상까지는 아니었지만 수십 시간 단위로 놓고 보면 확실히 익숙한 패턴이 반복된다는 느낌을 지우기는 어려웠습니다.

결말 스포일러 주의 용병들의 마지막 임무와 글룸헤이븐의 운명

여기서부터는 캠페인 진행과 관련한 내용을 다루니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는 분은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글룸헤이븐이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메인 캠페인은 명확한 하나의 결말을 향해 달려가기보다는 각 용병의 개인 서사가 하나씩 마무리되면서 자연스럽게 도시의 운명이 변화하는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도시를 둘러싼 세력 구도와 엔딩 분기가 달라지는데 그만큼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에 따라 마지막에 마주하는 도시의 모습도 다르게 그려집니다. 다만 원작 보드게임과 마찬가지로 디지털판 역시 하나의 거대한 서사적 절정을 향해 치닫기보다는 개별 용병들의 작은 이야기들이 쌓여 큰 그림을 완성하는 방식이라서 전통적인 RPG의 웅장한 결말을 기대했다면 다소 밋밋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은퇴시킨 용병들이 각자의 목표를 이루고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과정 자체는 나름의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마무리였습니다.

솔직하게 정리하는 글룸헤이븐의 장점과 단점

글룸헤이븐을 오랜 시간 플레이한 소감을 정리하면 원작의 정수를 충실하게 옮겨온 훌륭한 디지털 어댑테이션이라는 인상이 강합니다. 장점을 꼽자면 카드 기반의 독창적인 전투 시스템과 방대한 시나리오 분량 그리고 보드게임 특유의 준비와 정리 과정을 생략하고도 온전한 재미를 전달한다는 점이 확실한 강점입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협동 플레이를 모두 지원한다는 점도 원작보다 접근성을 크게 높인 부분입니다. 반면 단점도 명확합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미션 구조가 반복적으로 느껴지고 신규 플레이어에게는 난이도와 학습 곡선이 상당히 가파르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조작 인터페이스가 다소 투박하다는 지적도 커뮤니티에서 꾸준히 제기되는 부분입니다. 전략적인 턴제 전투와 다크 판타지 세계관을 좋아하고 긴 호흡의 캠페인을 천천히 즐길 준비가 되어 있다면 글룸헤이븐은 충분히 만족스러운 경험을 선사하지만 짧고 굵은 재미를 원하는 플레이어에게는 다소 부담스러운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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