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전설 여의 궤적 (英雄伝説 黎の軌跡), 뒷세계 해결사 반과 함께하는 궤적 시리즈 신작 후기


궤적 시리즈라는 이름만으로도 방대한 세계관에 압도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십 년 넘게 이어져온 이 장대한 JRPG 시리즈에서 여의 궤적은 시리즈 후반부를 여는 새로운 출발점입니다. 팔콤 창사 사십 주년 기념작으로 발표된 이 작품은 기존 섬의 궤적 시리즈와는 완전히 다른 무대와 주인공으로 승부를 걸었습니다. 오랜 팬들에게는 반가운 변화였고 동시에 신규 유저들에게는 진입 장벽을 낮추려는 시도이기도 했습니다. 이번 리뷰에서는 이 여의 궤적이 실제로 어떤 매력을 가진 작품인지 자세히 풀어보겠습니다.

뒷세계 해결사와 새로운 무대 칼바드 공화국

여의 궤적은 그동안 시리즈에서 여러 차례 언급만 되었던 제무리아 대륙의 또 다른 대국 칼바드 공화국을 새로운 배경으로 삼습니다. 주인공은 아크라이드 해결사 사무소의 소장인 반 아크라이드입니다. 흑발에 푸른 메쉬가 들어간 머리칼과 짙은 푸른 눈동자가 인상적인 그는 수도 이디스의 구시가지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뒷세계 해결사 스프리건입니다. 경찰이 미처 대응하지 못한 의뢰의 하청부터 시민들이 공공연하게 말할 수 없는 상담 그리고 범죄자나 언더그라운드 세력의 의뢰까지 처리하는 것이 바로 이 스프리건이라는 직업의 방식입니다.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들면서도 자기 나름의 신념과 도리를 지키려는 반의 캐릭터성은 기존 궤적 시리즈 주인공들과는 다른 결의 매력을 보여줍니다.

이야기는 명문고 교복을 입은 소녀 아니에스 클로델이 반의 사무소를 찾아오며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그녀는 증조부의 유산인 여덟 개의 원형 도력기 옥트 제네시스를 찾고 있었고 이를 계기로 반은 예상치 못한 거대한 사건에 휘말리게 됩니다. 조사가 진행되면서 반의 전용 전술 오브먼트에 탑재된 지원 인공지능 메어를 통해 검푸른 형상의 그렌델로 변신하는 새로운 힘을 각성하게 되고 이후 공화국 전역을 공포에 떨게 하는 마피아 조직 아르마타와의 대결이 본격화됩니다. 경찰이라는 공적인 입장에 얽매였던 기존 시리즈 주인공들과 달리 반은 뒷세계 해결사라는 위치 덕분에 훨씬 자유롭게 사건에 개입하는데 이런 입장 차이가 시나리오 전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습니다.

반과 해결사 사무소 동료들의 케미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아크라이드 해결사 사무소를 이루는 개성 넘치는 동료들입니다. 반은 현실적이고 드라이한 성격으로 보이면서도 자기만의 신념을 관철하는 타입으로 그려지는데 겉으로는 무심한 듯하면서도 의뢰인이나 동료를 챙기는 세심함이 묻어나는 인물입니다. 예를 들어 처음 아니에스가 상처를 입은 반에게 오만 미라라는 거액의 의뢰비를 건넸을 때도 자신이 받은 도움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 실제로는 일부만 받는 장면에서 그의 성격이 잘 드러납니다. 이런 디테일한 인물 묘사가 반이라는 캐릭터를 단순한 츤데레형 주인공을 넘어 입체적인 인물로 완성시킵니다. 함께 활동하는 사무소 동료들 역시 각자의 사연과 개성을 지니고 있어 파티 전체의 케미가 상당히 좋습니다. 특히 뒷세계라는 특수한 설정 덕분에 정통 히어로물과는 다른 현실적이고도 인간적인 관계성이 시리즈 전체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습니다.

신규 엔진의 도전과 아쉬운 로딩 문제

여의 궤적은 기존 섬의 궤적 시리즈에서 사용하던 낡은 엔진을 버리고 처음으로 자체 개발한 새로운 엔진을 도입한 작품입니다. 이 덕분에 비주얼과 연출 퀄리티는 이전 시리즈에 비해 확실히 진일보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다만 새로운 엔진을 처음 도입한 후유증인지 긴 로딩 시간과 간간히 발생하는 프레임 저하 문제가 지적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국내 리뷰에서도 이 부분을 아쉬운 점으로 짚었는데 오랜 시리즈 팬이라면 어느 정도 감안할 수 있는 수준이지만 쾌적한 플레이를 기대하는 유저에게는 거슬릴 수 있습니다. 또한 시나리오 개연성 면에서는 오히려 초기 제로의 궤적과 벽의 궤적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준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경찰이라는 입장 때문에 여러 제약을 받았던 이전 시리즈 주인공들과 달리 반과 해결사 사무소는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편법을 쓰기도 하는데 이런 자유로운 전개 방식이 신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궤적 시리즈 특유의 무게감이 다소 옅어졌다는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결말과 앞으로의 이야기에 대하여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아직 플레이하지 않으셨다면 주의해 주세요.

여의 궤적은 첫 작품답게 옥트 제네시스를 둘러싼 갈등과 마피아 조직 아르마타와의 대립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며 공화국 전체를 뒤흔들었던 아르마타는 결국 옥트 제네시스를 둘러싼 격전 끝에 괴멸됩니다. 사건이 일단락되며 해결사 사무소 멤버들은 각자의 길을 향해 흩어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시리즈 전체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후 이어지는 여의 궤적2와 계의 궤적을 통해 반과 동료들의 이야기는 훨씬 거대한 스케일로 확장되는데 특히 계의 궤적에 이르러서는 그렌델을 능가하는 초월적 존재와의 대결 그리고 제무리아 대륙 전체를 뒤흔드는 결말로 이어지며 반 아크라이드의 이야기는 다음 작품을 예고하며 마무리됩니다. 첫 작품인 여의 궤적만 놓고 보면 다소 열린 결말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이는 오히려 방대한 궤적 시리즈 특유의 장대한 서사를 예고하는 시작점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전체적으로 영웅전설 여의 궤적은 기존 궤적 시리즈 팬들에게는 반가운 변화이자 신규 유저들에게는 비교적 접근하기 쉬운 입구가 되어주는 작품입니다. 새로운 엔진 도입에 따른 기술적인 아쉬움은 분명 존재하지만 뒷세계 해결사라는 신선한 설정과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그 단점을 상당 부분 상쇄합니다. 궤적 시리즈에 입문하고 싶었지만 방대한 볼륨에 망설이셨던 분이라면 이 작품부터 시작해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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